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5세 (문단 편집) === 때 이른 죽음 === 하지만 얼마 못가 아들 [[헨리 6세]]가 태어난 직후, 프랑스 원정을 지휘하다가 한참 젊은 나이에 전염병인 [[이질(질병)|이질]]을 앓다가 죽었다. 헨리 5세는 건강이 나빠져 파리로 급하게 돌아왔다. 이때 그는 이질이 악화되어 죽어가고 있었으며, 말에 오르는 것조차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신하들이 가마에 실어야 했고 헨리는 8월 뱅센 성에 도착했다. 병상에서 그는 왕비 캐서린과 측근들을 불러모았고, 이때 호출을 받고 온 동생인 베드퍼드 공작한테 어린 헨리 6세의 후견인으로 임명하고 프랑스의 섭정직을 물려주었다. 그 다음엔 유언으로 반드시 부르고뉴와의 동맹을 유지할 것과, "상황이 나빠진다면 노르망디를 지키는 것에 집중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나의 대의명분만이 프랑스에 정당하고 항구적인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자기 합리화 비슷한 말을 덧붙였다. 이 말을 하고 헨리 5세는 8월 31일, 35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사후 캐서린이 그의 시신을 런던으로 이송하여 장례식을 치른 다음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게 된다. 사실 이질은 전근대 군대의 가장 큰 적이었다. 아무리 관리한다 해도, 전근대라는 환경에서 장기간 타지에 원정을 떠난 군대가 항상 위생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게다가 헨리 5세는 '전사왕'이라는 별명이 보여주듯이 웨일스 공 시절부터 병사들과 함께 최일선 진흙탕에서 구르는 타입의 지휘관이었고,[* 상기했듯이 슈루즈버리 전투에서도 직접 전투에 참전하여 병사들과 함께 최전선에서 싸우다가 반군 저격병의 화살을 얼굴에 맞았다.] 따라서 전염병의 위험에 그만큼 더 노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잉글랜드인들이 만든 역사를 다룬 작품과 영화들에서 멋지게 나오는 것과 정말로 대조적인 죽음. 그래서인지 죽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이질 환자들의 대다수는 전혀 먹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서 계속 설사만 하다가 탈수로 사망했다. 겨우 물을 먹여도 바로 밑으로 배출해버리기때문에 엉덩이 부분의 침대시트를 없애고 그 밑에 배설물을 받아두게끔 나무통 같은 것을 가져다두었다. 이미 이질로 고통받고 있는데다가 누워있는 환경조차 비위생적이었기에 중세시대에 이 병에 걸리면 사망선고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중세의 전쟁은 한번 이긴다고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현지 영주들에게 자신의 실질적인 힘을 보여주면서 항복을 받아내어야 오래 간다.[* [[에드워드 3세]]와 [[흑태자 에드워드|흑태자]]는 프랑스에게 많은 승리를 거뒀지만, 연이어 세상을 떠나며 전황이 원점으로 돌아가버렸다. 따라서 아쟁쿠르의 [[승리]]로 얻어낸 성과를 확실하게 다질 때까지는 계속해서 전쟁을 이어나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당시 프랑스는 [[국력]]에서 영국을 압도한터라 장기적으로 프랑스를 공격하여 피해를 주지 않으면 영국이 불리했다.] 문제는 헨리 5세가 사망한 시점에도 샤를 6세는 살아있었고, 헨리 6세는 아기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프랑스에서는 트루아 조약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르마냑파의 목소리가 점차 힘을 얻게 되었고, 이에 힘입어 도팽 샤를은 자신이 정당한 프랑스의 왕위계승자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부르고뉴파는 이러한 도팽 샤를의 주장을 트루아 조약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비록 도팽 샤를이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했으나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왕이 대관식을 올렸던 랭스[* 프랑크 왕국의 실질적인 창업주 [[클로비스 1세]]가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른 이래, 프랑스의 왕은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베르됭 조약과 메르센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실제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도 아니고 명목상 로마의 황위를 이은 신성로마제국도 아닌 프랑스로서는 랭스의 대관식을 통해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이어지는 나름의 정통성을 확보했던 것이다.]는 잉글랜드군 + 부르고뉴군의 점령 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그는 대관식도 치르지 못한 채 시농 성에서 골치를 썩이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프랑스의 성처녀 [[잔 다르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헨리 5세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황당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설마 한창 젊은 자신이 늙은데다 건강도 나빴던 프랑스 왕보다 먼저 죽는 것부터가 예측불허의 돌발사태이고, 그래도 자신이 남긴 군사적 성과 덕에 잉글랜드의 우세가 이어졌건만 웬 성녀가 갑자기 나타나서 전황을 갈아엎어버렸다.] 결국 갑작스러운 헨리 5세의 죽음, 그리고 뒤를 이은 아들 헨리 6세의 어린 나이와 무능, 잔 다르크로부터 시작된 도팽 측의 반격으로 인해 백년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